어린 왕자

어린 왕자

앙투안 드 생택쥐페리

문예출판사

전성자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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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적으로 생긴 여우를 그려보았다.
내가 무섭게 그린 게 아니라,
작가가 직접 이렇게 그린 거다.


84p

그러나 여우는 하던 이야기로 다시 말머리를 돌렸다.

"내 생활은 단조롭단다. 나는 암탉들을 쫒고 사람들은 나를 쫒지.

암탉들은 모두 똑같고 사람들도 모두 똑같아. 그래서 난 좀 심심해.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내 생활은 환히 밝아질 거야.

나는 다른 모든 발자국 소리와 구별되는 발자국 소리를 알게 되겠지.

다른 발자국 소리들은 나를 땅 밑으로 기어 들어가게 만들 테지만

너의 발자국 소리는 마치 음악처럼 땅 밑 굴에서 나를 밖으로 불러낼 거야!

그리고 저길 봐! 저기 밀밭이 보이지? 난 빵은 먹지 않아. 밀은 내겐 아무 소용도 없어.

밀밭은 나에게 아무것도 생각나게 하지 않아. 그건 서글픈 일이지!

그런데 네 머리칼은 금빛이야. 그러니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정말 근사할 거야!

밀은 금빛이니까 나에게 너를 생각나게 할 거거든.

그럼 난 밀밭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 소리를 사랑하게 될 거야..."

여우는 입을 다물고 어린 왕자를 오래오래 쳐다보더니,

"부탁이야..., 나를 길들여줘!"

하고 말했다.


85p

다음 날 어린 왕자는 다시 그리로 갔다.

"같은 시각에 오는 게 더 좋았을 거야."

여우가 말했다.

"이를테면,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갈수록 난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네 시에는 흥분해서 안절부절못할 거야. 그래서 행복이 얼마나 값지 것인가를

알게 되겠지!

그러나 네가 아무 때나 오면 몇 시에 마음을 곱게 단장해야 하는지 모르잖아.

의식이 필요하거든."

"의식이 뭐야?" 어린 왕자가 물었다.

"그것도 너무 자주 잊고 있는 거야." 여우가 말했다.

"그건 어느 하루를 다른 날과 다르게 만들고,

어느 한 시간을 다른 시간과 다르게 만드는 거지.

예를 들면 내가 아는 사냥꾼들에게도 의식이 있어.

그들은 목요일이면 마을의 처녀들과 춤을 추지.

그래서 목요일은 신나는 날이지!

난 포도밭까지 산보를 가고.

만약에 사냥꾼들이 아무 때나 춤을 추면, 하루하루가 모두 똑같이 되어버리고,

그럼 난 하루도 휴가가 없게 될 거야..."


87p

"그런데 넌 울려고 그러잖아!"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래, 정말 그래." 여우가 말했다.

"그렇다면 넌 아무것도 얻은 게 없잖아!"

"얻은 게 있지." 여우가 말했다.

"밀밭의 색깔 덕분에 말이야."

잠시 수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장미꽃들을 다시 가서 봐. 너의 장미꽃이

이 세상에 오직 하나뿐이라는 걸 깨닫게 될 거야.

그리고 내게 돌아와서 작별 인사를 해줘.

그러면 내가 네게 한 가지 비밀을 선물할게."


어린 왕자는 장미꽃들을 다시 보러 갔다.

"너희들은 나의 장미와 조금도 닮지 않았어.

너희들은 아직은 아무것도 아니야."

어린 왕자는 장미들에게 말했다.

"아무도 너희들을 길들이지 않았고

너희들 역시 아무도 길들이지 않았어.

너희들은 예전의 내 여우와 같아.

그는 수많은 다른 여우들과 똑같은 여우일 뿐이었어.

하지만 내가 그를 친구로 만들었고,

그래서 이제는 이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여우가 된 거야."

그러자 장미꽃들은 어쩔 줄 몰라 헀다.

"너희들은 아름답지만 텅 비어 있어."

그가 계속 말했다.

"누구도 너희들을 위해서 죽을 수는 없을 테니까.

물론 나의 꽃은 지나가는 행인에겐

너희들과 똑같이 생긴 것으로 보이겠지.

하지만 그 꽃 한 송이가 내게는 너희들 모두보다도 더 소중해.

내가 그에게 물을 주었기 때문이지.

내가 바람막이로 보호해준 것은 그 꽃이기 때문이지.

내가 애벌레를 잡아준 것도 그 꽃이기 때문이지.

불평을 하거나, 자랑을 늘어놓거나,

때로는 말없는 침묵까지 들어주었으니까.

결국 내 꽃이니까 말이야."


그리고 그는 여우에게로 돌아갔다.

"잘 있어." 어린 왕자가 말했다.

"잘 가." 여우가 말했다.

"내 비밀은 이런 거야. 그건 아주 단순하지.

오로지 마음으로 보아야만 잘 보인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단다."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단다."

어린 왕자는 잘 기억하기 위해 되뇌었다.


"너의 장미꽃을 그토록 소중하게 만든 건,

네가 그 꽃을 위해 쓴 그 시간 때문이란다."

"내가 내 장미꽃을 위해 쓴 시간 때문이란다..."

어린 왕자는 잘 기억하기 위해 되뇌었다.

"사람들은 그 진리를 잊어버렸어." 여우가 말했다.

"하지만 넌 그걸 잊으면 안 돼.

네가 길들인 것에 너는 언제까지나 책임이 있지.

너는 네 장미꽃에 책임이 있어..."


"나는 내 장미꽃에 대해 책임이 있어..."

어린 왕자는 잘 기억하기 위해 되뇌었다.


92p

"사막은 아름다워." 그가 다시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언제나 사막을 사랑했다.

사막에서는 모래 언덕 위에 앉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무엇인가 침묵 속에서 빛난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것이 어딘가에 샘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지..."

나는 사막의 그 신비로운 빛남이 무엇인지를 문득 깨닫고 흠칫 놀랐다.

어린 시절, 나는 오래된 낡은 집에서 살았다.

그 집에는 보물이 감춰져 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오고 있었다.

물론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것을 찾으려 든 사람도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보물로 하여 그 집 전체는 매력이 넘쳤다.

우리 집은 저 가장 깊숙한 곳에 보물을 감추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 내가 어린 왕자에게 말했다.

"집이건 별이건 혹은 사막이건

그것들을 아름답게 하는 건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지!"

"아저씨가 나의 여우와 같은 의견이어서 기뻐." 그가 말했다.


96p

"아저씨 별의 사람들은 한 정원 안에 장미꽃을 오천 송이나 가꾸지만..."

어린 왕자가 말했다.

"자기들이 찾는 걸 거기서 발견하지 못해..."

"그래. 발견하지 못한단다..." 내가 대답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찾는 것은 단 한 송이의 꽃이나

물 한 모금에서 발견될 수도 있어.."

"물론이지." 내가 대답했다.

그러자 어린 왕자가 덧붙였다.

"그러나 눈은 보지를 못해. 마음으로 찾아야 해."


97p

나는 끄적거려두었던 그림들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어린 왕자는 그것들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아저씨가 그린 바오밥나무들은 양배추 비슷하게 생겼어..."

"아, 그래?"

그 바오밥나무들 그림에 대해 난 몹시 우쭐해 있지 않았던가!

"여우는...귀가..뿔 비슷하고, 너무 기다랗고!"

그는 또 웃었다.

"너무 심하잖아, 꼬마 친구. 나는 속이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보아뱀밖에 못 그린다니까."

"아, 괜찮아." 그가 말했다.

"아이들은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연필로 부리망을 그렸다.

그것을 어린 왕자에게 주면서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모르는 무슨 계획을 가지고 있는 거지..."

그러나 그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지구에 떨어진 지가.. 내일이면 꼭 일 년이야..."

그러고서는 잠시 묵묵히 있던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바로 이 근처에 떨어졌었어.."

그러고는 얼굴을 붉혔다.

그러자 왠지 모르게 또다시 알지 못할 슬픔이 솟구쳤다.

그러면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럼 일주일 전 내가 너를 알게 된 날 아침, 사람 사는 소장에서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서 네가 혼자 걷고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구나.

떨어진 지점으로 돌아가고 있었던 거야?"

어린 왕자는 다시 얼굴을 붉혔다.

그래서 머뭇거리며 나는 말을 이었다.

"일 년이 되어서 그러는 거야?"

어린 왕자는 또 얼굴을 붉혔다.

그는 묻는 말에 대답하는 일이 없었으나

붉힌다는 것은 '그렇다'는 뜻이 아닌가?

"아!" 내가 말했다. "난 두렵구나..."

그런데 그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아저씨는 이제 일을 해야 해. 아저씨 기계로 돌아가.

난 여기서 아저씨를 기다리고 있을게.

내일 저녁에 돌아와...."

하지만 나는 안심이 되지 않았다.

여우 생각이 났다.

누군가에게 길들여지게 되면

좀 울게 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103p

"밤이면 별들을 바라봐줘. 내 별은 너무 작아서 어디 있는지 지금 가르켜 보여줄 수가 없어.

그 편이 오히려 더 좋아. 내 별은 아저씨에게는 여러 별들 중의 하나가 되는 거지.

그럼 아저씬 어느 별을 바라보든 다 즐거울 테니까.

그 별들은 모두 아저씨 친구가 될 거야. 그리고 아저씨에게 내가

선물을 하나 하려고 해."

그가 다시 웃었다.

"아! 꼬마 친구, 꼬마 친구. 그 웃음소리가 난 좋아!"

"그게 바로 내 선물이 될 거야.. 그건 물도 마찬가지야."

"무슨 뜻이지?"

"사람들에게 별들은 다 다른 존재야. 여행하는 사람에겐 별은 길잡이지.

또 어떤 사람에겐 그저 조그만 빛일 뿐이고. 학자에게는 연구해야 할 대상이고.

내가 만난 사업가에겐 금이지. 하지만 그런 별들은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어..

아저씬 어느 누구도 갖지 못한 별들을 가지게 될 거야.."

"무슨 뜻이니?"

"밤에 하늘을 바라봅 때면 내가 그 별들 중 하나에 살고 있을 테니까,

내가 그 별들 중 하나에서 웃고 있을 테니까, 아저씨에겐

모든 별들이 다 웃고 있는 듯이 보일 거야.

아저씬 웃을 줄 아는 별들을 가지게 되는 거야!"

그는 또 웃었다.

"그래서 아저씨의 슬픔이 가셨을 때는 - 언제나 슬픔은 가시기 마련이니까 -

나를 알게 된 것을 기뻐하게 될 거야.

아저씬 언제까지나 나의 친구로 있을 거야.

나와 함께 웃고 싶을 거고.

그래서 이따금 그저 좋아서 괜히 창문을 열겠지..

그럼 아저씨 친구들은 아저씨가 하늘을 바라보며 웃는 걸 보고

꽤나 놀랄 거야.

그러면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줘.

'그래, 별들을 보면 언제나 웃음이 나오거든!'

그들은 아저씨가 미쳤다고 생각하겠지.

난 그럼 아저씨에게 못할 짓을 한 셈이 되네.."

그리고 그는 다시 웃었다.

"나는 아저씨에게 별들이 아니라, 웃을 줄 아는

조그만 방울들을 잔뜩 준 셈이 되는 거지."

그리고 그는 또 웃었다.

그러더니 다시 심각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오늘 밤은.. 오지 마."

"난 네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

"난 아픈 것 같이 보일 거야.

죽어가는 것처럼 보일 거야.

그러기 마련이거든. 그런 걸 보러 오지 마.

그럴 필요 없어."

"난 네 곁을 떠나지 않을 테야."

그러나 그는 근심스러운 빛이었다.

(...)

그날 밤 나는 그가 길을 떠나는 걸 보지 못했다.

그는 소리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뒤쫓아가서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잰걸음으로

주저 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그저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아! 아저씨 왔구나.."

그러고서는 내 손을 잡았다. 그러나 그는 다시 걱정을 했다.

"아저씨가 온 건 잘못이야. 마음 아파할 텐데.

내가 죽은 듯이 보일 테니까.

정말로 죽는 건 아닌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있지? 너무 멀잖아.

이 몸뚱이를 가져갈 수가 없어. 너무 무거워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낡은 껍질을 벗어저리는 거나 같을 거야..

낡은 껍질을 벗어버리는 건 슬픈 일이 아니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조금 풀이 죽어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다시 기운을 내려 안간힘을 썼다.

"참 좋을 거야. 나도 별들을 바라볼 테니까.

별들이란 별은 모두 녹슨 도르래가 있는 우물로 보일 테니까.

별들이 모두 내게 마실 물을 부어주겠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참 재미있을 거야! 아저씬 오억 개의 작은 방울들을 가지게 되고

난 오억 개의 샘물을 가지게 될 테니."

그러고서 그도 역시 아무 말이 없었다.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기야, 나 혼자 한 발짝 걸어가게 해줘."

그러더니 그는 그 자리에 앉았다.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가 다시 말했다.

"아저씨, 내 꽃 말인데.. 나는 그 꽃에 책임이 있어!

더구나 그 꽃은 몹시 연약하거든! 몹시도 순진하고.

별것도 아닌 네 개의 가시를 가지고 세상에 맞서

자기 몸을 방어하려고 하고.."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어서 나도 앉았다.

그가 말했다.

"자.. 이제 다 끝났어."

그는 또 조금 망설이더니 다시 일어섰다.

한 발을 내디뎠다.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의 발목께에서 노오란 한 줄기 빛이 반짝했을 뿐이었다.

그는 한순간 꼼짝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그는 나무가 쓰러지듯 천천히 쓰러졌다.

모래 때문에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