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송영택 옮김
문예출판사
72p
나도 자신의 척도로 남을 측정하는 것의 어리석음을 날이 갈수록 잘 알게 되었다.
더욱이 나 자신의 일도 얼마든지 있고 내 가슴은 이렇게 거칠게 파도치고 있으니-
남이 무슨 짓을 하든 간에 내가 알 바 아니다.
다만 나로 하여금 내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었으면 고맙겠다.
무엇보다도 화가 나는 것은 그 알량한 지위라든가 신분 따위들이다.
신분 차별의 필요성이라든가 나 자신이 그 덕을 크게 보고 있다는 것은 물론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서 조그만 기쁨과 한 가닥 행복의 빛을 즐기려고 하는데
방해를 받기는 싫다.
74 ~ 75p
정신을 놓고 멍청하게 있는 이 나의 모습을, 사랑하는 사람이여 만일 당신이 보신다면...
감각은 말라버리고 한순간의 만족도 없고
한순간의 행복도 없습니다.
공허! 오직 공허뿐! 마치 만화경 앞에 서서 눈앞에 작은 인간이며
작은 말이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이것은 착각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기분입니다.
때때로 이웃사람의 나무로 된 손을 잡아보고는 깜짝 놀라서 물러납니다.
밤에는 해돋이를 보려고 마음먹지만 아침이 되면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또한 낮에는 달빛을 즐기려고 생각하고 있다가도 저녁이 되면 방에서 나가지도 않습니다.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지, 무엇 때문에자는지, 나 자신도 잘 모릅니다.
내 창조력을 발효시킬 효모가 없어졌습니다. 밤이 깊어도 나를 잠자지 못하게 했던
매력이 없어졌습니다. 날이 새면 눈을 뜨게 해주었던 그 자극을 잃고 말았습니다.
82p
"그 큰어머니도 그 자리에 와 계셨는데, 참으로 고약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죠!
베르테르, 어제 저녁에도, 그리고 오늘 아침에도 당신과의 교제에 대하여 설교를 들었어요.
당신을 깎아내리고 헐뜯는 것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을 뿐
제대로 변명도 할 수 없었고 또 그것을 허락도 안 해주었습니다."
그녀의 말 하나하나가 비수처럼 나의 가슴을 찔렀다. 말하지 않고 가만히 묻어두는 편이
얼마나 더 자비로운 일인지를 그녀는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덧붙이는 것이었다.
앞으로 어떤 소문이 퍼질 것인가, 어떤 패거리들이 만세를 부를 것인가,
그리고 벌써부터 비난의 표적이 되어 있었던,
거만하게 남을 깔보는 나의 태도가 드디어
벌을 받게 되었다고 고소해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그런 일을 빌헬름이여, 거짓 하나 없는 동정어린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듣자
내 가슴은 갈가리 찢어져 아직도 들끓고 있다.
차라리 맞대놓고 비난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그 녀석 배때기에 단도라도 푹 찔러넣을 수가 있지.
피를 보면 기분이라도 한결 가라앉겠지. 아아, 나는 몇 번이나 비수를 들고
이 울적한 가슴에 바람구멍을 내려고 했다.
84~85 p
나는 보리수 밑에 섰다.
일찍이 이 보리수는 소년 시절에 내 산책의 목표이기도 했고 경계이기도 했다.
참으로 많이 변했구나!
그 무렵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행복했으며 끊임없이 미지의 세계에 동경을 품고
그곳에 내 마음을 위한 풍요한 양식, 넘치는 즐거움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며,
내 가슴의 열망과 그리움이 채워지기를 소망했다.
이제 먼 세계에서 돌아와보니 - 오오 벗이여, 얼마나 많은 희망이
어이없이 무너지고 말았는가!
나는 눈앞에 산맥을 보았다. 그것은 수천 번이나 내가 소망했던 대상이었다.
시간 가는 것도 잊고 여기에 앉아 산 너머 저쪽으로 그리움을 달래면서 조용히,
그리고 부드럽게 저물어가는 숲과 계곡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일정한 시간이 되어 이 못 견디게 좋은 곳을 떠나서 다시 돌아가야만 했을 때의 그 괴로움!
(...)
이 강물이 흘러갈 나라들에 대해 얼마나 신비한 공상을 많이 했던가.
그러나 마침내 나의 상상력도 한계에 달해버렸지만, 그래도 더 멀리 가야 한다고,
더욱 멀리 달려서 마침내는 눈에 보이지 않는 먼 저쪽의 경치를 눈앞에 생생히, 그러고는
취한 듯이 바라보곤 했던 것이다.
벗이여, 영광에 가득 찬 옛 조상들은 그같이 좁은 세계에서도 그토록
행복하게 살지 않았던가! 그들의 감정도, 그들의 노래도 어린이 같았다.
오디세우스가 헤아릴 수 없는 대양과 끝없는 대지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
그 말은 그토록 진실하고 인간적이었으며 절실하고 깊었으며 그리고 신비했다!
100 p
인간끼리 이리도 냉담해질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면
스스로 내 가슴을 쥐어뜯고 머리로 받아 깨뜨리고 싶어지곤 한다.
사랑도, 기쁨도, 친절도, 황홀도
내가 상대에게 배풀지 않으면 상대도 나에게 베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의 가슴이 행복에 넘쳐 있더라도
자기 앞에 차갑고도 무기력하게 서 있는 자를
행복하게 해줄 수는 없을 것이다.
103p
빌헬름이여, 진심어린 자네의 동정과 호의에 찬 충고에 감사한다.
그러나 부디 안심해주게. 나는 견디어나갈 작정이다.
살아가는 일에 아무리 지쳐 있더라도 아직 밀고 나갈 만한 힘은 있다.
나는 종교를 숭배한다. 그것은 자네도 알고 있는 대로다.
종교는 숱한 피폐한 자에는 지팡이고 많은 쇠약해진 자에게는 희생의 물줄기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다만 - 종교는 과연 누구에게나 그렇게 해줄 수 있는가, 그렇게 해주지 않으면 안 되는가?
(...)
실제로 나는 자신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알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입을 열고 싶지 않기 때문이네.
자신의 처지를 어디까지나참고 견디며 자신의 잔을 비우는 것,
이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이 아닐까?
천상의 하느님마저도 인간으로 현신하신 그 입술에
이 잔은 너무 쓰다고 느끼셨는데, 내가 왜 허세를 부려서
사뭇 달콤한 시늉을 해 보일 필요가 있는가?
나의 온 생애가 삶과 죽음 사이에 서서 전율하고,
과거가 어두운 심연을 넘어 밝은 빛처럼 미래를 비추며,
나를 에워싼 모든 존재가 나락으로 떨어져가서
자신과 함께 세계가 몰락한다는 이 무시무시한 순간에 어찌 부끄러울 것이 있겠는가?
바싹 추적당하여 의지할 곳 없이 끊임없이 추락해갈 때,
기어오르려고 헛되이 몸부림치는 그 무력함 때문에 이를 갈며
"하느님, 하느님! 왜 저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부르짖는 그 목소리야말로
피조물인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내가 왜 그러한 말을
부끄러워하겠는가, 그러한 순간에 겁을 집어먹겠는가?
106 p
때때로 자신에게 말한다.
"네 운명은 비할 데가 없다. 다른 사람들은행복하다 - 이렇게까지 괴로워하는 자는 없었다."
그러고는 옛시인의 시를 읽는다. 마치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나는 많은 괴로움을 견디어야 한다! 아아, 옛사람도 이처럼 비참했던가?
107 ~ 109 p
"이봐요, 비밀을 지켜야 해요."
손가락을 입에 대면서 그는 말했다.
"애인에게 꽃다발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했죠."
"좋겠군요" 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다른 것은 다 가지고 있죠, 부자거든요."
"그래도 당신 꽃다발이 기쁠 거요" 하고 나는 대답했다.
"아아, 보석도 있고 관도 있어요."
"그 사람의 이름은 뭐죠?"
"네덜란드 정부가 내게 봉급을 주려고만 했으면" 하고 그는 딴전을 부렸다.
"이렇게는 되지 않았을 거요! 내게도 행복했던 시절은 있었죠! 지금은 다 틀렸소. 나는 지금..."
하늘을 바라보는 이슬 맺힌 눈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
나는 노파의 말을 가로막고 물었다.
"그때는 매우 행복하고 유복했었다고 자랑하던데 그것이 언제입니까?"
"어리석은 녀석이죠!"
애처롭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노파가 말했다.
"정신이 이상해졌을 무렵의 얘기지요. 언제나 그것을 자랑하고 있어요.
정신병원에 들어가 있어서 자신에 관한 일은 아무것도 몰랐을 때의 일입니다."
나는 벼락을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지폐 한 장을 노파 손에 쥐어주고 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
"그대가 행복했던 시절!"
나는 거리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서 소리쳤다.
"마치 물 속의 물고기처럼 행복했던 시절!"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 인간은 아직 철이 들지 않은 시절과
분별심을 잃고 난 뒤가 아니면 행복해질 수 없다고 당신께서는 정하신 것입니까! -
가엾은 사나이여! 그렇지만 나는 그대의 우울증이 부럽다.
모든 감각기관이 흐트러져서 점차 쇠약해가는 그대의 상태가 부럽다.
그대는 그대의 여왕님을 위하여 꽃을 꺾으려고 희망에 넘쳐서 집을 나선다 - 한겨울인데도.
그리하여 꽃을 찾을 수 없다고 슬퍼하며 목적도 없이 집을 떠나서,
나섰을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돌아온다.
그대는 만일 네덜란드 정부가 돈을 지불해주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망상을 하고 있구나.
행복한 사나이다.
자기가 행복하지 못한 것을 이 세상의 탓으로 돌릴 수가 있다!
그대의 불행은 그대의 황폐한 마음과
착란된 두뇌 속에 있는 것이어서,
이 세상의 어떠한 제왕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그대는 모른다. 그대는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110 p
소원이다 - 아아, 여보게, 나는 이제 끝장이다. 이 이상 견딜 수 없다!
오늘 나는 로테 곁에 앉아 있었다 - 앉아 있었다 말일세.
(...)
그러자 갑자기 그 사람은 그립고도 더없이 감미로운 멜로디를 치기 시작했다.
그것이 너무나 돌발적이었기 때문에 마음속까지 평온하게
위안받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하여 이 노래를 들은 그 무렵의 일,
우울하던 시기, 어둡고 불쾌한 나날, 수없이 좌절된 희망 등
흘러간 날의 추억이 되살아났다.
나는 방 안을 왔다 갔다 했다. 착잡한 감정이 가슴을 짓눌러 숨이 막힐 것 같았다.
(...)
"제발 그만둬주십시오!"
그녀는 손을 놓고 가만히 나를 쳐다보았다.
"베르테르!" 그녀는 내 마음속에 스며드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분이 좋지 않으시군요. 좋아하는 곡도 싫다고 하시니. 댁으로 돌아가세요!
그리고 제발 쉬도록 하세요."
나는 뿌리치듯이 나왔다. 그리고 - 하느님!
나의 이 비참함을 아신다면 제발 끝나게 해주심시오.
125 p
오오, 그리운 사람!
천 갈래 만 갈래로 흐트러진 이 가슴속으로 이따금 살그머니
어떤 생각이 다가왔습니다.
죽이자고 하는, 당신의 남편을! 당신을 - 나를!
그것으로 족합니다.
아름답게 갠 여름날 저녁, 그 언덕 위를 오를 때는
제발 나를 생각해 주십시오.
골짜기를 거쳐서 그 언덕에 자주 오르내렸던 나를 추억해주십시오.
그리하여 멀리 교회 묘지 쪽을 바라보다 저녁놀 속에 키 큰 풀이 바람에 날리는
나의 무덤 근처를 바라봐주십시오. 쓰기 시작했을 때는 침착했었는데
지금은 어린애처럼 울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모두 생생히 눈 앞에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128 p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긴 의자에 앉아 있는 베르테르 옆에 앉아 있었습니다.
"읽을 게 없어요?"
그녀는 말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저 서랍 안에 당신이 번역하신 「오시안의 노래」가 들어 있어요.
저는 아직 읽지 않았어요. 당신께서 읽어주셨으면 하고 늘 생각했었는데,
그 뒤로 기회도 없었고 기회를 만들려고 해도 만들어질 것 같지 않았죠."
베르테르는 조용히 웃으며 노래의 원고를 꺼냈습니다.
그것을 손에 들었을 때 베르테르의 온몸에는 소름이 끼쳤습니다.
원고를 펴 가만히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베르테르는 읽기 시작했습니다.
"어두운 밤하늘의 별이여, 그대는 서쪽에서 아름답게 빛을 내며
구름 사이로 빛나는 얼굴을 들어 언덕을 넘어서 엄숙하게 흘러간다.
그대는 무엇을 구하며 황야를 내려다보는가? 울부짓던 바람도 멎고
멀리서 골짜기의 물소리가 들려온다. 바위에 부딪치는 물소리도 아득하고
들녘에 무리져 나는 날벌레 소리도 멀어진다.
아름다운 빛이여, 그대는 무엇을 찾는가? 하지만
그대는 조용히 웃으며 지나치니 물결은 흥겹게 그대를 안고
그대의 사랑스러운 머리칼을 감기고 있다.
잘 있거라, 고요한 빛이여.
모습을 보여라, 오시안의 장려한 영혼의 빛이여!
(...)
아아, 슬프다. 언덕 위에 버려진 콜마는 좋은 목소리를 가졌으니,
살가르는 돌아올 것을 약속했지만 주위는 끝내 밤의 어두운 장막에 싸였네.
들어라, 언덕 위에 홀로 앉은 콜마의 목소리를."